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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51)] 자주국방의 새로운 시작…전시작전권 회복(上)

관리자 2026-01-12 17:17:32
미군정(1945.9.9.~1948.8.15) 통치 시절 주둔했던 주한미군이 1949년 6월 30일 철수를 한 이래 1년 만인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따라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지상군의 선발대 800여 명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7월 1일이었다. 



1950년 6월28일 서울에 들어온 북한군 탱크. 미 스미스부대는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해 유엔군이 상륙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각자 실탄 120발과 C-레이션 2일 분만 가지고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 투입되어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주권을 양보한 사례“

7월 7일 유엔 안보리가 유엔군 사령부 설치안을 가결했고 맥아더(1880~1964) 장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이 됐다. 7월 12일 주한 미군에 대해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미국은 주한 미국 대사의 이름으로 한국 정부에 보낸 서한에서 다음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①미국 군법회의가 주한 미군과 그 구성원에 대한 형사재판권을 행사한다. ②한국인이 미군 및 그 구성원에 가해 행위를 범하였을 때는 그 한국인을 미군이 구속한다. ③주한 미군은 미군 이외의 어떠한 기관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는 한국 정부에 의해 간단히 수락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한국전쟁의 한 당사자로서 최고의 지위와 권한을 갖게 되었다. 북한군에 계속 밀리자 한국군을 미군의 단일한 지휘체계에 편입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1948. 8. 15. 서울, 대한민국 정부수립기념 식장에서 담소하는 맥아더 미 극동군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



7월 14일 이승만은 UN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지휘권을 귀하에게 양도한다"라고 통고하였고, 동시에 한국군 총참모장 정일권(1917~1994)에 대해서는 "귀관은 이후 유엔군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라고 명했다.

이 통고와 명령은 조약이나 협정에 의해 성문화된 것도 아니고 국회의 비준을 얻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곧바로 실시되었다.

이는 한국군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s, OPCOM)을 둘러싼 오랜 논란의 출발점이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한국전쟁은 미국과 북한의 정면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현리전투 유재흥973년부터 1976년까지 3년간 UN군 사령관으로 근무한 리처드 스틸웰(1917~1991)



1973년부터 3년간 UN군 사령관으로 근무한 리처드 스틸웰(1917~1991)은 이를 "지구상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주권을 양보한 사례(The most remarkable concession of sovereignty in the entire world)"라고 평가했다. 

◆ 현리 전투, 한국군 지휘권 완전히 미국으로

작전지휘권을 넘겨받은 유엔군은 당분간 형식적으로나마 한국군 지휘부를 통해 명령을 하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1951년 5월, 한국군 3군단이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투에서 수적, 물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포위당하자 최고 지휘 책임자인 3군단장 유재흥(1921~2011)은 부하들을 남긴 채 회의 참석을 이유로 경비행기를 타고 군단 본부로 돌아갔다.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1920~2020)의 저서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에는 "이 때 유재흥은 작전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이후 3군단은 예하 사단장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 위해 무질서한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 과정에서 국군 제3군단은 지휘체제가 와해되고 많은 병력의 손실을 입었으며, 주요 장비를 거의 모두 파괴하거나 유기하였다. 





2군단장 재직시절로 추정되는 시기의 유재흥 장군. 맨 왼쪽이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





현리지구 전투에서 붙잡힌 국군 포로들의 모습.


현리 전투는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 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1892~1992) 미8군 사령관은 현리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국군 제3군단을 해체했으며,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작전권도 박탈했다.

이로써 한국군 지휘권이 실질적으로도 완전히 미국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됐다. 육군본부의 역할은 인사·행정·군수·훈련으로 제한되었다.

◆ 작전권 놓고 티격태격

한국과 미국이 작전지휘권을 놓고 양국은 여러 번 티격태격했다. 1950년 9월 15~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전세가 뒤집혔다. 한국은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과 소련의 개입이 없을 때 유엔의 결의에 따라 북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는 유엔이 북진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북진하려 했다. 



김백일 제1군단장이 38선 돌파 이후 표지판을 세우고 기념 문구를 적는 장면. 



결국 미국으로부터 한국군의 ‘제한된 추격권’을 얻었다. 그리고 1950년 10월 1일 육군 보병 제3사단이 38선을 넘었다.

한국과 미국은 북진 후 수복지구를 두고 또 충돌했다. 한국은 북진으로 수복한 북한 땅을 한국이 통치해야 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유엔의 감시 아래 한반도 전체 선거를 치러 통일하기 전까지 유엔사의 군정에 둬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때 작전지휘권이 문제가 됐다. 결국 중공군의 개입으로 갈등이 흐지부지됐지만, 수복지구 통치는 한·미의 이견으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에버레디 계획(Everready Plan)

1953년 3월 한국전쟁을 주도하던 스탈린(1878~1953)이 사망한 후 휴전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이승만은 1953년 4월 9일 아이젠 하워(1890~1969) 미국 대통령에게 북진통일 의지가 가득 담긴 서한을 보냈다. 





1953년 6월 중고학생들이 휴전을 반대하는 혈서를 쓰고 있다.



한국 정부의 휴전 반대 목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하자 미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의 언행을 위험스럽게 우려하였고, 일부는 이승만의 제거를 고려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클라크(1896~1984) 유엔군 사령관은 이승만을 '보호 감금' 시킨 뒤 임시정부를 세우는 '비상수단'을 취할 것을 본국 정부에 제안하였다.

1953년 5월 이후 미 국무부와 군부는 이승만을 제거하고 좀 더 다루기 쉬운 정부를 세우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클라크는 이와 관련하여 유엔 사령부에 의하여 주도되는 쿠데타 작전, 즉 '에버레디 작전(Everready Plan)'으로 명명된 이 계획의 구체적 방침은 이러했다. 

① 한국 대통령에게 유엔군 사령관 명령을 준수할 것을 요구 ② 반항하는 지휘관은 미 8군 사령관에 충성하는 사령관으로 교체 ③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한국군에게 연료·탄약 지원 중단 ④ 유엔 사령부에 의한 군사정부 수립을 선포 등이었다.

에버레디 작전 실행 여부에 대해서는 미국 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미 군부는 에버레디 작전을 지지하였으나, 국무부는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1952년 12월 방한 후 광릉에 주둔한 수도사단을 방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



5월 30일 합동회의 결과 미국은 에버레디 작전을 수행하지 않고, 한국과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결정을 했다.

이승만이 미군의 작전지휘권을 무시하고 북진을 강행했다면, 그가 제거되는 것은 물론이고 제2의 미군정이 실시될 수도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군 지휘권을 미국에 넘겨준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전작권 이양으로 인한 위험과 불편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었다. 그는 전작권을 외국에 넘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생생히 보여준 인물이다.

1953년 10월 1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1954.11.17. 발효)을 계기로 작전지휘권은 '작전 통제권(Operational Control, OPCON)'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유엔사로 귀속됐다. 

◆ '자주국방' 국시(國是)로 

작전 통제권 문제가 다시 떠오른 것은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서다.

그해 1월 21일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과 23일 북한의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Pueblo) 나포 사건의 대처를 놓고 당시 한미 정부가 충돌하면서였다. 





경향신문 1968년 1월24일자 1면은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을 다루고 있다.



청와대 습격엔 대응하지 않던 미국이 푸에블로호 사건에는 '데프콘 2'를 발령하자 격분한 박정희는 미국에 작전 통제권 환수를 요구한 것이다.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밝히자, 박 전 대통령은 1970년 "북한 단독의 침공에 대해서는 우리 단독의 힘만으로도 능히 이를 분쇄할 수 있는 자주국방력을 확보해야 한다"라고 선언하며 자주국방을 국시(國是)로 삼았다.

1977년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주한 미군 철수를 통보했을 때도 박 전 대통령은 "60만 대군을 가진 우리가 미군 4만에 의존한다면 무엇보다 창피한 일이다. 이제 우리도 체통을 세울 때가 되었다"라며 자주국방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후 유엔군 사령관이 보유하고 있던 작전 통제권은 1978년 한미연합사 창설을 계기로 주한미군 사령관과 유엔군 사령관을 겸하는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위임됐다.

◆ 평시 작전통제권 44년 만에 되찾아

헌법과 같은 수준으로 한국과 한국군을 지배해온 작전권에 대한 변화 흐름을 만든 건 노태우였다. 1987년 대선에서 당시 집권당의 노태우 후보가 처음으로 '작전 통제권 재조정 및 용산 기지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냉전 종식과 한반도 주변 환경의 변화, 한국군의 전력 성장에 따라 노태우 행정부는 작전 통제권 환수를 추구하며 1988년 초부터 미국과 이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

원래는 작전 통제권 전체를 환수하는 것으로 한미 양국 사이에서 협의됐으나 협상 과정에서 1992년 말에 평시 작전 통제권만 환수하고 전시 작전 통제권은 1996년 이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잠정적으로 합의함으로써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은 전시와 평시로 나뉘게 됐다.





1994년 12월1일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양호 합참의장으로부터 평시작전통제권 환수 신고를 받은 뒤 군 지휘관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렇게 결정하는 과정에서 반발 세력이 있었다. 육군본부를 주축으로 하는 군 수뇌부는 노골적으로 노태우 대통령을 비하하면서 개혁에 저항했고, 청와대 안보보좌관실에 소속된 장교들은 수시로 협박을 받았다.

1994년 12월 1일, 김영삼 대통령은 합참의장과 육·해·공군 3군 작전지휘관들로부터 평시 작전 통제권 환수 신고를 받았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6·25 전쟁의 비극 속에서 유엔군에 넘겨준 (평시) 작전권을 44년 만에 환수하는 것은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