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행사
서울석세스어워드
미스인터콘티넨탈코리아대회
국민행복마라톤대회
K-STAR골프리그
인문고전읽기대회
강연회
보도자료
평생교육원
언론방송경영최고위과정
방송제작과정(연출,CG)
유학센터
캐나다홈스쿨(어학연수)
중국유학
게시판
공지사항
시청자소리
blog
행사
서울석세스어워드
미스인터콘티넨탈코리아대회
국민행복마라톤대회
K-STAR골프리그
인문고전읽기대회
강연회
보도자료
평생교육원
언론방송경영최고위과정
방송제작과정(연출,CG)
유학센터
캐나다홈스쿨(어학연수)
중국유학
게시판
공지사항
시청자소리
blog
서울STV에서 주최하는 행사를 안내해드립니다.
>
[歷史콘텐츠(54)] 1400년의 시간을 넘어...위대한 발견, 백제 금동대향로
관리자
2026-04-14 17:00:30
첨부파일
(
0
)
백제의 6군과 신라의 10군 추정 위치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재위 412~491)의 공격으로 백제는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재위 455~475)이 전사하면서 국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 후 문주왕(재위 475~477)은 한성을 포기하고 장수왕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천혜의 방어진 곰나루 웅진(공주)으로 천도했다.
웅진은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넓은 평야나 국제 교류를 위한 교통로 확보에는 불리했다. 또한 웅진 시기의 백제 왕실은 귀족 세력의 강력한 견제 속에서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고, 왕권은 흔들렸다.
◆ 중흥의 꿈..사비 천도
성왕(재위 523~554)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적 기반이 필요했다. 결국 성왕은 538년 웅진 체제를 넘어 새로운 도약을 위해 사비(부여) 천도를 단행했다.
사비 부여의 전경도. [사진=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성왕은 수도를 옮기며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이는 백제 왕실의 뿌리가 북방의 강자 '부여'에 있음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대등한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새 수도 사비는 웅진과 달리 더 넓은 평야가 있어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고, 금강을 통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성왕은 부소산(해발 고도 96m) 남쪽 기슭인 관북리에 왕궁 터를 잡아 이를 기준으로 사비도성을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로 만들고 행정구역을 ‘상·전·중·하·후부’ 5부(수도) 5방(지방)으로 정비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또한 이 시기 백제는 '동아시아 문명 교류의 허브'로서 가장 세련된 문화를 꽃피웠다.
◆ 신라와 백제의 나제동맹
433년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백제 비유왕(재위 427~455)과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은 나제동맹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장수왕 이후 한 세기 이상 전성기를 누리면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에 대한 공동 대응에 목적이 있었다.
551년(성왕 29년) 9월,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탈환했다.
나이로 보면 성왕이 진흥왕의 아버지뻘이었지만 두 왕은 14년간 재위 기간이 겹친 동시대 인물이었다.
백제의 6군과 신라의 10군 추정 위치
본래 이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었고, 양국은 승전 이후 백제가 한강 하류 지역 6군(포천, 서울, 하남, 과천, 화성, 인천)을, 신라가 상류지역 10군(화천, 양구, 춘천, 가평, 여주, 원주, 제천, 안성, 진천, 괴산)을 차지했다.
백제는 76년간 고구려에 점령당했던 한강 하류지역을 회복함으로써 오랜 숙원을 매듭지었다.
◆ 신라 진흥왕의 배신... 영원한 동맹은 없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551년(양원왕 7년) 고구려는 신흥세력 돌궐의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다 왕위를 놓고 벌인 귀족 간의 다툼으로 정치적으로 위기였다.
내우외환의 위기에 빠진 고구려는 신라와 접촉한다. 고구려는 신라에 한강 유역을 양도하는 대신 신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밀약을 맺었다.
하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553년 백제의 한강유역을 기습적으로 점령하여 지방행정구역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신주 지방관으로 김무력(?~?) 장군을 임명했다.
백제의 숙원이었던 고토회복의 기쁨이 2년 만에 무너지는 사건이었다. 결국 신라의 배신행위로 433년부터 120년간 이어져왔던 나제동맹은 결렬되고 백제와 신라는 철전지원수가 되었다.
◆ 관산성 전투의 비극
백제가 군사적 보복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태자 부여창은 554년(성왕 32년)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에 보복 공격을 가했다. 이것이 백제 역사의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인 관산성(충북 옥천군 군서면) 전투이다.
멀리 보이는 세 봉우리가 관산 일대이고 이곳에 설치된 것이 관산성이다.
백제, 왜, 대가야의 연합군의 관산성 기습공격은 성공했고 관산성을 장악해 나갔다. 관산성이 함락 위기에 놓이자 고구려와의 밀약으로 고구려 견제가 필요 없었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지키던 김무력 부대를 불러들였다.
신라의 증원군이 몰려오면서 대반격이 시작되었고, 전투는 밀고 밀리는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그 무렵 백제가 관산성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성왕은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밀을 탐지하고 매복한 신라군에게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삼국사기」는 "왕이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구진벼루)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을 만나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살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 성왕 전사지 유적비 / 성왕교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군은 지휘체계가 붕괴되고, 태자 부여창이 간신히 탈출하는 등 대혼란에 빠졌다. 이 전쟁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을 비롯하여 장병 2만 9600명이 전사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백제는 멸망할 때까지 100여 년간 신라를 공격한 횟수가 25회, 신라가 백제를 공격한 횟수는 4회로 3년 6개월마다 한번 꼴로 전쟁을 치룬 셈이었다.
결국 동맹을 깬 신라의 배신적 행위를 응징하고자 이어간 보복전쟁의 결과가 백제 멸망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근원이 되었다.
◆ 성왕 추모사업
자신이 고집한 전쟁에서 부왕을 잃은 부여창은 죄책감에 잡혀 승려가 되고자 하였으나 중신들의 설득으로 3년 만에야 백제 27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위덕왕(창왕, 재위 554~598년)이다.
위덕왕에게 남은 상처는 깊었다. 위덕왕은 관산성 전투 패전의 책임과 함께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 있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국력을 결집시키고 왕권 강화가 절실했다.
따라서 위덕왕은 절대왕권을 가졌던 성왕에 대한 추모사업을 가장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성왕의 권위와 위업을 후광으로 삼아 정치적 기반을 재구축하려고 했다.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백제 왕실 사찰인 능사 전경. 사진=국립부여박물관
그 중심에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백제 왕실의 사찰로 추정되는 위덕왕 14년에 창건한 능사(陵寺)가 있다.
567년 위덕왕은 성왕의 위업을 기리며 위령하기 위한 능사의 목탑에 사리를 안치함으써 사업의 대미를 장식했다.
성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 관리와 제사 등의 의례가 능사에서 이뤄졌다. 성왕의 넋을 기리는 만큼 중요한 제사 도구인 향로 제작에는 백제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됐을 것이다.
위덕왕은 서로 다른 생명체가 공존하는 낙원의 모습을 향로에 담아 백제의 영원불멸을 간절히 염원했던 것이다.
국보 287호 금동대향로. 사진=서울Stv뉴스
백제는 660년(의자왕 2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고, 663년 부흥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멸망했다.
사비성이 함락되는 절체절명의 순간 왕실 사찰을 지키던 누군가는 제사 때마다 사용하던 대향로를 지키기 위해 허둥대며 숨길 곳을 찾았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언젠가 돌아와 대향로를 찾겠다고 다짐하며.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백제 멸망과 함께 그 약속은 잊혔다. 대향로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진흙 구덩이서 찾은 ‘국보 중의 국보’
1990년대 초 부여 왕릉원과 주변의 고분 모형 전시관을 찾는 관광객이 늘자 부여군 등은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조성하고자 정비 작업에 나섰다.
1992년 12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이뤄진 시굴 조사에서 건물 주춧돌 일부와 기와·토기 조각 등이 나오자, 1993년 10월 국립부여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2차 조사가 이뤄졌다.
1993년 12월 12일 부여군 능산리 절터 진흙 속에서 대향로를 발견할 당시 모습. 사진=국립부여박물관
그 결과, 1993년 12월 12일 백제의 왕릉급 무덤이 모여있는 능산리 고분군 절터 서쪽 공방터 안 물웅덩이에서 진흙에 파묻힌 채 놀라운 유물이 우연히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의 최고의 걸작 국보 중 하나인 높이 61.8cm, 무게는 11.8kg이나 되는 백제 금동대향로이다.
당시 금동대향로는 배수로 바닥에 거꾸로 박혀 있었고, 진흙이 공기를 막아 본래의 형태를 보존하는 최적의 조건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발견되기 전까지 1400년에 이르는 세월을 진흙에 묻혀 있었다.
◆ 금동대향로 마주하다
백제 예술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금동대향로는 백제인들이 꿈꿨던 우주의 질서가 아래에서 위로 차곡차곡 쌓인 걸작으로 대향로는 꼭지와 뚜껑, 몸체, 받침 등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서울Stv뉴스]
꼭지에는 수탉 볏을 한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긴 꼬리를 드높게 날리며 턱 아래 작은 구슬을 괸 채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사진=서울Stv뉴스]
뚜껑은 부드러운 능선이 겹겹이 쌓인 산 모양이다. 42마리의 동물, 5인의 악사, 12명의 인물이 74개의 봉우리 사이에 있다. 봉우리 사이로 계곡이 있고, 폭포가 있고, 시내가 흐른다.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보인다.
코끼리 등에 올라탄 사람, 말을 탄 채 등을 돌려 활을 쏘고 있는 사람, 약초를 향해 몸을 굽히고 있는 사람, 폭포 아래에서 긴 머리를 적시는 듯한 사람도 있고, 지팡이를 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노인도 보인다.
사진=서울Stv뉴스
뚜껑 정상부에 있는 5명의 악사는 각각 백제삼현, 종적, 북, 백제금, 배소 등 악기를 연주하고 호랑이·사슴·코끼리 같은 동물과 상상 속 짐승이 어우러진다.
금동대향로 속 다섯 악사 [자료=국립부여박물관]
5악사의 표정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은은하다. 악사들은 모두 민머리를 하고 오른쪽 귀 부분에 상투를 틀고 있다.
5악사 앞뒤로 각각 1개씩 모두 10개, 봉황의 가슴에 2개 모두 12개의 연기 구멍이 뚫려 있다. 안개처럼 퍼지는 연기 속에서 5악사가 연주하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향로가 갑자기 하나의 살아 있는 세계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진=서울Stv뉴스
대향로의 뚜껑과 몸체 사이에 경계선이 있는데 뚜껑을 돌리면 대향로의 몸통과 분리된다. 몸체는 반원형의 대접 모양이며 3단 연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층을 이룬 연꽃잎은 몸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단의 폭이 가장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들게 묘사했다. 연꽃잎이 바깥으로 접힐 듯 조각된 모습이 생동감을 자아낸다.
몸체 연꽃 잎에는 춤추는 학, 날개 달린 자라, 물고기를 삼키고 있는 수달, 머리에 깃털이 있고 발은 넷이며 몸은 도롱뇽의 형태를 한 청어, 날개 달린 잉어 등 27마리의 동물과 2명의 사람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사진=서울Stv뉴스
대향로의 받침대는 수중생물의 왕 용이 향로의 몸체를 입으로 받치고 세 다리를 땅에 딛고 한 다리는 들고 용트림을 하듯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땅을 딛는 다리는 정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향로 전체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 능산리사지 석조 사리감(국보 288호)
1995년 5월부터 10월까지 실시한 조사에서는 중문 터, 목탑 터, 금당 터가 차례로 드러났다. 특히 목탑지 밑에서 석조 사리감(사리를 보관하는 용기, 국보 288호)이 발견됐다.
사리감은 향로의 제작 시기와 배경을 확정 짓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사리 용기는 이미 도굴되고 없었지만 감실의 좌·우 양 측면에는 예서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다.
창왕명석조사리감. 국립부여박물관 제2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사진=서울Stv뉴스
"백제창왕십삼년태세재 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제 창왕(위덕왕) 13년 정해년(567년)에 왕의 누이인 매형공주께서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절은 창왕, 즉 위덕왕이 누이와 함께 관산성 전투에서 비명횡사한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한 절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2025년 12월 23일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이 유물 한 점만을 전시하기 위해 지어진 백제대향로관이 문을 열었다.
부여박물관 금동대향로관. 사진=서울Stv뉴스
백제대향로관 건립에는 5년간 예산 211억 원이 투입됐다. 전시관 건물 자체가 그 유물의 역사를 상징하게 설계했으며 단 하나의 작품 앞에서 그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공간을 만들었다.
전시관을 나오며 백제 장인의 숨결이 살아있는 금동대향로를 다시 바라보았다.
목록
이전글
HDC 임대차로 위장 360억 계열사 부당 지원\'…...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