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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56)] 권력욕에 찌든 수양대군, 계유년에 정변을 일으키다

관리자 2026-06-15 10:35:22
세종은 1417년에 태어난 둘째아들이 늘 걸렸던 것 같다. 성격이 불같으며, 사람을 끌어당기는 기운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아 왕권 욕심이 엿보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둘째 아들의 군호를 진평, 함평, 진양으로 고쳐 부르다 1445년에 수양대군으로 정했다. 수양으로 정한 것은 수양산의 백이와 숙제 고사를 염두에 두고 왕권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 어린 임금의 즉위

문종이 세상을 뜬 나흘 후인 1452년 5월 18일, 열두 살 어린 세자 홍위는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어린 왕은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곤룡포를 입고 용상 위에 앉았다. 짧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팍의 오조룡(五爪龍) 금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국가표준영정 100호로 공식 지정된 단종 어진(임금의 얼굴을 그린 그림), 가슴팍 발톱이 5개인 오조룡 금박이 있다.



어린 왕이 등극하면 왕의 어머니와 할머니인 대비,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어린 왕이 성장할 때까지 지켜주고, 15세가 되면 수렴청정을 거두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단종의 경우,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1418~1441)가 단종을 낳고 하루만에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 소헌왕후(1395~1446)마저 일찍 세상을 떠난 뒤라 수렴청정을 할 대비도 없었다.

◆ 즉위교서에 반발하다

이날 단종은 24개 조항으로 부기되어 있는 즉위교서를 반포했다. 이날의 교서에는 분경(奔競)을 금하는 조항이 특별히 추가되었다.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로 벼슬을 얻기 위해 권세가의 집을 드나들며 인사 등을 청탁하는 행위로 교서에 "이조, 병조 집정가에 분경을 금지한다"고 명문화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수양대군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는 수양이 왕위에 뜻이 있음을 공공연히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조, 병조 집정가에 분경을 금지한다"고 명문화한 단종 즉위년 5월 18일 4번째 기사



결국 수양의 항의에 놀라 좌의정 김종서(1383~1453)와 영의정 황보 인(1387~1453)이 분경을 허용한 것은 수양대군의 세력을 키우도록 허락한 격이었다.

◆ 신숙주의 마음을 떠보다

1452년 8월 10일, 집현전 직제학 신숙주(1417~1475)가 수양대군 사저 문 앞으로 지나갔다. 수양은 "신수찬"이라며 그를 불렀고 신숙주는 말에서 내려 인사했다.

수양은 웃으며 말했다. "어찌 과문불입(過門不入, 문앞을 지나면서 들이지 않는 것)하는가?" 하고, 이끌고 들어가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수양이 말하기를 "옛 친구를 어찌 찾아와 보지 않는가? 이야기하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비록 죽지 않을지라도 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지 않은가.“

신숙주 또한 이 말의 의미를 깨닫고 답했다. "장부가 아녀자의 품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재가부지(在家不知, 집에 있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것)’라고 할 만하겠습니다." 수양이 말하기를, "그럼 중국으로 가세" 하였다. 

이처럼 수양은 신숙주, 권람(1416~1465) 같은 벼슬아치는 물론 한명회(1415~1487), 홍윤성(1425~1475) 같은 시정잡배들까지 끌어들여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다





모화관 영은문 앞에서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조선. 모화관은 현재 독립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1452년(단종 즉위년) 8월 22일,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다. 사신단이 한양에 당도하면 첫째 날 하마연(下馬宴)을 시작으로, 떠나는 날 상마연(上馬宴) 등 몇 차례의 잔치가 벌어졌다.

원래는 단종이 주관해야 하지만 부왕의 상중이라는 이유로 수양이 사신단을 접대했고, 수양은 명 사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애썼다.

수양은 하마연에서 명 사신의 자리를 북쪽에 설치하고 자신의 자리는 동쪽에 설치했다. 북쪽은 임금의 자리이므로 수양은 일개 사신에게 군신의 예를 취했던 것이다. 

잘못 북쪽에 앉았다가 귀국 후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한 명 사신들은 거듭 동서로 대좌하기를 청하자 수양이 받아들여 대좌하게 되었다.

다음날에도 수양은 명 사신을 위해 익일연을 베풀었고, 사흘 후인 8월 26일에도 수양은 태평관에 나가 사신들이 떠나기 직전에 베푸는 상마연을 베풀었다. 그다음 날 사신이 떠날 때도 수양은 모화관에 나가 사신들을 전송했다. 

◆ 수양은 왜 사은사로 북경에 갔을까

수양이 북경에 사은사로 갈 뜻을 표명한 것은 이로부터 보름이 채 안 되어서였다.

수양의 속셈을 알고 있던 황보 인은 당연히 반대했다. "공은 종실의 어른이니 먼 길을 가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안평대군이 대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수양은 자신이 가겠다고 거듭 청했고 도승지 강맹경(1410~1461)이 단종에게 수양을 추천했다. 결국 단종은 수양을 사신으로 결정했다.





조선 사신들의 필요에 따라 의주에서 성경(심양)을 거쳐 연경(북경)에 이르는 경로를 자세히 그린 '입연정도도(入燕程途圖)'


수양이 명나라로 떠난 것은 10월 12일이었다. 수양은 안평대군이 가게 된 사신 자리를 빼앗고도 의심이 되어 황보인과 김종서의 두 아들을 인질로 데려갔다. 

북경에 도착한 수양은 자신의 몸을 한껏 낮추었다. 명나라의 육부상서에 들어갈 때는 한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으며, 황제 앞으로 나가서는 다섯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간 데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명나라의 태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김종서나 안평대군 같은 반대세력의 견제를 덜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1453년 봄, 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온 수양대군은 명나라에서 자신의 책봉을 거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 국혼을 주청하다-1

1453년 5월 17일, 수양은 여러 종친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를 맞아들이라고 청한다. 왕위 찬탈 소문을 불식시키고 경계의 눈으로 주시하는 김종서 등 의정부 대신들의 시선을 둔화시키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러나 단종은 국상 기간에 혼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돌아가신 부왕께 누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양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날 수양은 세 번씩이나 주청한 후에야 물러났다.

이틀 후에 수양은 종친들을 이끌고 또다시 국혼을 주청한다. 이때도 단종은 거부했다. 수양은 5월 27일 다시 종친들과 함께 봉장(封章,임금에게 올리던 글)을 올리는데 모든 종친들의 의사임을 강조했다. 

단종의 답은 같았다. "내가 만약 이를 들어주려 하였다면 처음에 어찌 들어주지 않았겠는가. 결단코 들어줄 이유가 없다."

이 방법은 꽤나 효과가 있었다. 세 번씩이나 왕비 간택을 요청함으로써 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세간의 소문을 어느 정도 불식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 계유정변의 명분

1453년 9월 25일, 수양대군의 측근 권람은 자신의 집에 가죽 만드는 일을 하는 계수(?~?)라는 종이 있는데 그가 우연찮게 영의정 황보인을 모시는 종으로부터 엄청난 정보를 들었다는 것이다.





단종실록 1453년 9월 25일  기사 중 일부



황보인의 종은 계수에게 자신이 모시는 영상 대감이 조만간 김종서 대감과 결탁해 단종을 폐하고 안평대군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어마어마한 발언을 쏟아 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황보인의 종이 말한 정보는 제법 구체적인 날짜 까지 제시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는 10월 12일에서 22일 사이에 거사를 하기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 병력은 어떻게 동원할 것인지 작전은 어떻게 계획되었는지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계수로부터 이 정보를 접한 권람은 황급히 수양대군에게 위급을 알렸고, 이는 수양대군이 거사를 일으킬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 단종과 김종서를 안심시키다

안평대군의 거사계획을 알았다는 9월 25일,  국혼 문제가 거부 되자 수양대군은 연달아 치세와 관련된 의견을 담아 단종에게 상소를 올려 네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바른사람을 가까이 할 것", 둘째는 "백성의 힘을 아낄 것", 셋째는 "군사를 사랑하는 것", 넷째는 "도적을 그치게 하는 것"이었다.

단종은 크게 기뻐하며 승정원에 "이 상소를 가지고 의정부에서 의논하라." 하고, 상소를 필사해 곁에 항상 두고 보겠노라고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수양대군에게 안장을 갖춘 준마 한필을 선물로 보냄으로써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고자 했다.

느닷없는 이 상소는 단종과 김종서 등을 안심시키기 위한 위장이었다. 충성스런 상소를 올려 단종과 김종서를 안심 시킨 후 본격적인 쿠데타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나흘 후인 9월 29일, 수양은 자신의 집으로 한명회(1415~1487), 권람(1416~1465), 홍달손(1415~1472), 양정(?~1466) 등을 불러 거사 날을 잡았다. 10월 10일이었다.

◆ 그대로 결행하다

1453년(단종 1) 10월 10일, 이른 새벽 밤의 정적을 깨고, 수양의 사저에 몰래 들어오는 자들이 있었다. 한명회, 권람, 홍달손이었다. 





영화 에서 김종서와 수양대군 역할을 맡은 배우 백윤식과 이정재. /사진제공=㈜쇼박스


수양이 입을 열었다. "오늘이 거사 날이니 그대들은 약속대로 움직이라. 김종서가 가장 교활하니 내가 역사 한두 명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에 가서 그를 베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정변 계획을 최종 점검한 후 수양은 활쏘기 대회를 명분으로 그동안 끌어모은 수십 명의 무사들을 불러 후원에서 활을 쏜 후 술자리를 배풀었다.

해가 저물자 수양대군은 무사들을 모아놓고 '지금 김종서 등이 정사와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농단해 장차 안평대군을 옹립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다'며 분개한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수양대군은 자신이 직접 이 간악한 무리들을 처단하고자 한다며 무사들에게 동참을 요구했던 것이다.

무사들에게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공격하겠다는 수양의 말은 단순한 활쏘기가 아니라 역모였던 것이다. 거사에 동조하는 무사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반대했다.

수양과 한명회가 공을 들여 포섭했음에도 사태가 이렇게 되자 수양은 당황했다. 수양은 한명회를 불렀다.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길옆에 집을 지으려면 참견하는 사람이 많아 3년이 되어도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큰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당장 결행하자는 뜻이었다.

수양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쿠데타 당일 날, 무사들이 이탈하는 소동이 있었음에도 수양과 한명회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 하룻밤의 승부..계유정변





한명회가 한밤중에 살생부를 들고 나타난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날이 저물자 수양은 김종서의 집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임어을운(?~?)은 철퇴를 품에 감추고 말고리를 잡았다. 또 양정 등은 미복차림으로 수양을 뒤따르게 하였다.

수양이 왔다는 전갈을 들은 김종서는 밖으로 나섰다. 집안으로 들라는 김종서의 권유를 수양은 거부했다. 칼을 든 양정, 철퇴를 든 임어을운과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편지 한 통이 어디 갔느냐?" 수양은 임어을운을 불렀다. 수양의 명에 따라 임어을운은 자연히 김종서에게 다가갔다.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달빛에 비춰보았다.

그때였다. 수양은 얼른 임어을운에게 내리치라고 눈짓했다. 임어을운은 감추었던 철퇴를 꺼내 김종서의 머리를 쳐서 쓰러뜨렸다. 계유정변의 시작이었다.

김종서를 쓰러트린 수양은 성안으로 들어와 순청(巡廳, 순찰 관청)으로 향했다. 홍달손에게 순졸을 이끌고 뒤를 따르게 하고, 단종이 임시로 기거하던 시좌소(時坐所)로 달려갔다. 

공포감에 사로잡힌 단종 앞에서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난을 일으켜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했기에 김종서를 척살했다는 거짓보고를 올렸다.

◆ 한양도성, 하룻밤 사이 도살장으로

뒤이어 수양대군은 왕명을 빙자해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시키도록 했다. 황보인 등 수양의 반대편에 섰던 대신들은 물론 수양 편에 섰던 대신들도 한밤중에 급히 대궐로 들어왔다.




서용선 작가의 역사화 '계유년'



한명회는 무뢰배들과 함께 문에 지켜섰다. <살조>에 이름이 올랐으면 죽고, <생조>에 이름이 올랐으면 살아서 이 문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대신들의 목숨이 일개 경덕궁 궁지기 한명회에게 달려 있는 상황이 되었다.

입궐 하지 못한 대신들은 군사를 보내어 죽였다. 하물며 현릉(문종 묘)의 비석 공사 감독을 하고 있던 이조판서 민신(?~1453)은 현장으로 군사를 보내어 죽였다. 

◆ 김종서의 죽음,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은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다. 김종서는 심하게 피격을 당했는데도 살아남았다. 안평대군에게 사태를 알리고 내금위를 불러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으나 형세는 불리했다.

김종서는 여장을 한 후 도성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이미 숭례문, 돈의문, 서소문 등의 각 성문은 수양대군 일파에 장악된 후라 굳게 닫혀 있었다.

결국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실패한 김종서는 둘째 아들의 처가댁에 숨어 있다가 수양대군이 급파한 군사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종서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었다.





용산 전쟁기념관의 김종서 동상 / 정조대왕급 이지스 구축함(KDX-III Batch-II)의 마지막 기체인 3번함 '대호김종서함'



그것은 단종의 죽음이자 그가 섬겼던 세 임금, 즉 태종과 세종, 문종이 만들어놓은 정상적인 헌정질서의 죽음이었다.

수양대군 일파는 김종서 부자를 비롯한 황보인 등 주요 대신들은 이미 주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거리에 효수하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냄으로써 정변을 마무리했다.

수양과 그 무리들은 쿠데타에 정당성을 불어넣기 위해 자신들의 거사를 '계유정난'이라고 명명했다. 검은 닭의 해인 계유년에 어지러운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어차피 승자가 붙이는 이름이었다.

다음날인 10월 11일 수양은 ‘영의정부사 영경연서운관사 겸 판이병조사’라는 관직에 제수되어 조선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왕'이란 말만 붙이지 않았다 뿐이지 임금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