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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콘텐츠(58)] 忠臣 성삼문, 功臣 신숙주
편집인
2026-08-10 16:3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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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윤 6월 11일, 단종이 경회루에 올랐다. 이때 수양대군은 경회루 아래 서 있었다.
단종은 예방승지 성삼문(1418~1456)에게 대보(大寶, 옥새)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왕명으로 옥새를 가져오던 성삼문이 경회루 연못가에서 옥새를 끌어안고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 열다섯에 '왕(王) 위(上)의 왕' 상왕(上王)이라니
성삼문이 바친 옥새를 받아든 단종은 경회루 아래에서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넘겼다.
실록은 "단종이 대보를 받들어 전하니, 수양대군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승자의 기록일 뿐 사실상 살기 위한 항복 선언이었다.
국보224호 경회루. 경회(慶會)란 ‘경사스러운 연회’라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써 만난 것을 말한다.
당대의 인물이자 생육신 중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은 「육신전」에서 선위 당시의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수양대군이 선위를 받을 때에 성삼문이 예방승지로서 국새를 안고 통곡하니 수양대군이 고개를 들어 이를 눈여겨보았다"
이렇게 수양은 즉위에 성공해 세조가 되었다. 단종은 상왕이 되어 물러났다. 이제 경복궁의 새로운 주인은 세조가 되었으며 단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455년(세조 1) 윤6월26일, 세조는 “매월 2일·12일·22일에는 상왕께 친히 문안하겠다. 만약 연고가 있다면 그 다음날 가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세조는 몇 차례 “상왕께 문안을 드린다”면서 창덕궁에 행차했다.
38살 세조가 15살 조카를 상왕으로 모시고 문안을 올린다는 것은 단종에게는 좌불안석이었다.
세조 역시 상왕 단종이 여전히 도성 안에 살아 있고 점차 장성함에 따라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 공신들의 나라
세조는 즉위한 직후, 또 한 번의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 임금이 되었으니 논공행상이 없을 수 없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폐위하고 자신이 왕이 되었는데, 이 거사가 성공하자 신하들의 공적을 따져 공신의 책봉과 포상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좌익원종공신녹권 이다.
자신이 왕이 되는데 큰 역할을 한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좌익공신(左翼功臣)'이라 하였다.
좌익공신은 세조 집권의 주역이랄 수 있는 세 사람 한명회, 신숙주, 권람을 필두로 총 46명으로 구성되었다.
3개월 후에는 공신의 자제, 사위, 수종자들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하였는데 무려 2,300여 명이나 되었다.
원종공신에게 줄 벼슬이 부족하자 나이가 많은 자는 일은 없이 녹봉만 타가는 검교직(檢校職)을 제수했으니 공신이 아니면 벼슬을 꿈꾸기 어려웠다.
세조는 왕위의 명분과 정통성에 흠이 있으므로 불안했다. 「조선왕조실록」의 '술자리' 기록 970여 건 가운데 「세조실록」의 ‘술자리’ 기록이 절반에 가까운 460여 건이나 된다.
세조로서는 종친과 공신들을 친왕 세력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들에 대한 친화책의 일환으로 '술자리'를 자주 베풀고 함께 취하였던 것이다.
◆ 상왕 복위기도 사건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에서 왕세자를 거치지 않은 대군 출신으로서 수양의 즉위는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주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비판한 '찬탈(簒奪)'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 동작구 ‘사육신 역사공원’ 내 ‘의절사’에는 총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세종 때 집현전 등을 통해 성장한 유학자들이 찬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성삼문, 박팽년(1417~1456), 하위지(1412~1456), 이개(1417~1456), 유성원(?~1456), 유응부(?~1456) 등이 상왕 단종의 복위를 계획한 것이다.
이들 입장에서 수양의 즉위는 명분도 원칙도 없는 정변이며, 세조를 폐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는 것이야말로 정통성의 회복이었다. 그들이 세운 계획은 세조 암살이었다.
1456년(세조 2) 6월 1일, 세조의 즉위를 인정해 주러 온 명나라 사신들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세조를 호위하기로 되어 있던 성승(?~1456)과 유응부가 세조와 의경세자(1438~1455)를 제거하는 것이 상왕 복위 계획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차질을 빚는다. 한명회가 연회 장소인 광연전이 좁고 덥다 하여 호위무사인 별운검을 들이지 말도록 청한 것이다. 별운검이 무산되자 상왕 복위를 꾀하던 주모자들 간에는 의견이 엇갈렸다.
성승과 유응부 같은 무장들은 결행하자고 주장한 반면, 성삼문과 박팽년 같은 문관들은 별운검을 세우지 않고 세자가 오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훗날을 기약하자며 물러서지 않아 결국 거사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 "낮이 어두웠다"
그다음 날인 6월 2일, 실록은 "낮이 어두웠다(晝晦·주회)"고 적고 있다.
낮이 어두웠던 바로 그날 함께 단종 복위를 꽤 했던 김질(1422~1478)과 그의 장인 정창손(1402~1487)이 세조에게 성삼문 등이 상왕 복위계획을 꾸몄다고 고변한 것이다.
두 사람의 고변으로 즉시 성삼문 등을 비롯한 주동자들과 연루자 70여 명이 줄줄이 압송됐다. 조정은 곧 거대한 고문장으로 변했다.
경복궁 사정전 앞마당은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했던 사육신을 국문했던 곳이다.
세조는 성삼문 등을 경복궁 사정전으로 끌어와 친히 국문하였다. 사정전 앞뜰에는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단말마의 비명이 궁궐의 담을 타고 넘었다.
세조는 붙잡힌 집현전 학사들을 달래기도 하고 고문도 했지만, 이들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조를 ‘나으리’라 칭하며 세조를 자극했다.
"세조: 네가 나에게 나으리라고 칭하고 있는데... 성삼문: 상왕이 계신데 어찌 나으리의 신하가 되겠습니까..."
'전하'와 '나으리'. 이 두 호칭 사이에 조선 왕조의 정통성 논쟁 전체가 들어 있었다.
'전하'는 합법적인 왕에 대한 경칭이다. '나으리'는 관직 있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세조는 왕이 아니라 찬탈자라는 것이 성삼문이 '나으리'를 고집한 이유였다.
◆ 둥둥 울리는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용선 작가의 역사화 '처형장 가는길'
성삼문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남긴 ‘절명시’ 한편이 전해진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는 목숨을 재촉하는데(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하네.(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 저승길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어갈까.(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6월 8일, 또 한 번 살육이 자행되었다. 백관들을 군기감 앞길에 빙 둘러서게 한 다음 성삼문·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쟁·권자신 등을 거열형에 처하였다.
거열형은 양팔과 양다리를 각각의 다른 수레에 묶고 네 마리의 말을 몰아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게 하는 극형이다.
누구도 이들의 시신을 거둘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들 역시 대역 죄인이 되기에. 전해진 이야기로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1435~1493)이 시신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충남 논산의 성삼문묘, 일지총. 팔도로 조리돌림당하던 그의 다리 하나가 묻혔다 해서 일지총이라 한다.
김시습이 몰래 성삼문의 시신 일부를 묻었다는 곳은 어디인지 알 길이 없지만, 충남 홍성군 홍복면에는 유품이 묻힌 곳이 있으며, 논산 가야곡면에는 다리만 묻힌 일지총(一支塚)이 있다.
◆ 부녀자들과 토지를 나누어주다
복위 사건 석 달 후인 1456년 9월 세조는 의금부에 전지를 내려 복위 사건 관련자들의 부녀자들을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부원군 박종우(?~1464)에게 주고, 성삼고의 아내 사금과 한 살 된 딸은 정창손에게 주고... 성승의 아내 미치는 계림군 이흥상(?~1465)에게 주고.”
1456년 9월 7일 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그 숫자는 무려 170여 명이었다. 이들은 19년이 지난 1475년(성종 6)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뿐만 아니라 1457년(세조 3) 3월, 세조는 상왕 복위기도 사건 관련자들과 그 부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도 자신을 지지한 종친과 공신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성삼문의 당진·양주 전지는 임영대군(1420~1469)에게, 김문기(1399~1456)의 영동 전지는 정인지에게, 유응부의 포천 전지는 신숙주에게... 내려 주었다."
◆ 단종도 알고 있었다
성삼문 등이 거사를 앞두고 단종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성삼문이 “상왕(단종)도 역모 사건에 참여했느냐”고 문초에 “알고 있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권자신(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의 동생·?~1456)이 그 어미에게 고하여 상왕께 알렸다…거사 당일(6월1일) 아침에도 권자신이 먼저 창덕궁에 나아가니, 상왕께서 긴 칼을 내려 주셨다.”
권자신에게 물으니 권자신의 대답도 성삼문과 같았다.
이 칼은 상왕이 복위 모의에 동의했다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상왕 단종이 모의에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자 정국이 격랑 속으로 빠졌다.
1457년(세조 3) 1월29일 양녕대군(1394~1462)과 정인지(1397~1478)는 종친과 육조 참판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세조를 찾아와 “상왕의 거처를 궁 밖으로 옮기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세조는 “(유배 중인) 금성대군의 집을 수리하여 상왕을 모신 뒤 군사들로 하여금 그 주변 경계를 확실히 하라는 명을 내렸다. 단종은 사실상 연금되었다.
◆ "신숙주, 단종의 비 송씨를 받으려 했다"
단종 복위를 꾀하는 무리가 계속 생겨났다. 1457년(세조 3) 6월21일 단종의 장인이던 송현수(?~1457)가 지방 수령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이에 세조는 “인심이 불안하고 난을 선동하는 무리가 그치지 않는다”면서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명했다. 청령포를 유배지로 고른 이는 영월 수령을 지냈던 신숙주였다.
영월로 유배를 떠나는 단종이 정순왕후와 마지막 이별을 했다고 알려진 청계천 영도교.
6월 22일 영월로 유배 가던날 단종은 영도교에서 정순왕후 송씨(1440~1521)와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원래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라는 이름의 이 다리는 단종 부부의 생이별 이후 영영 건너가 이별한 다리라 하여 영도교라 불리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루아침 사이에 노비의 신분으로 격하 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살 수밖에는 없었던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에 대한 글이 조선중기 문신 윤근수(1537~1616)가 지은 「월정만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단종의 비 송씨(정순왕후)는 적몰돼 관비가 되었다. 그때 신숙주가 공신의 여종으로 받아내고자 하여 세조에게 청하였으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 "신숙주는 어찌하여 사육신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
성삼문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으로 죽음을 당했지만 후에 사육신으로 불리며 충절의 대명사로 조선시대 내내 추앙을 받았다.
반면, 신숙주는 세종에서 문종, 단종, 세조를 거쳐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하며 두 번의 영의정을 지냈으며 공신에 네 번이나 책봉되었다. 이처럼 당대에 성삼문과 신숙주, 두 사람이 지나간 발자취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림이 정계에 등장하면서 사육신과 단종에 대한 복권이 추진되고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1698년(숙종 24) 사육신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신숙주는 충의를 저버린 변절자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임금들까지 신숙주에 대한 폄하된 평가를 내렸다. 조선 24대 임금 헌종(재위 1834~1849)은 신숙주가 사육신이 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성삼문 등 사육신을 칭송했다.
「헌종실록」 1845년(헌종 11) 11월 9일자 기록에 따르면 "신숙주는 어찌하여 사육신이 한 일을 하지 않았는가......장하다 사육신의 절개여(申叔舟, 何不爲六臣之所爲乎...... 壯哉, 六臣之節也")
1455년 신숙주가 공신에 책봉됐을 때 포상으로 제작된 공신 초상화로 초상화 속 신숙주는 풍채 좋고 당당한 30대의 모습이다.
신숙주에 대한 민중의 폄하도 시작된다. 바로 숙주나물의 등장이다. 숙주나물과 신숙주를 연관 지은 최초의 한글 기록은 1924년 이용기(1870~1933)가 편찬한 요리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다.
원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숙주라 하는 것은 세조 임금 때 신숙주가 여섯 신하를 반역으로 고발하여 죽였기 때문에 이를 미워하여 나물 이름을 숙주라고 한 것이다...성인군자라면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정통성 없는 정변을 일으켰던 수양대군 세조를 선택한 신숙주는 그 한 번의 판단 때문에 역사적 대중적으로 변절자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 신숙주의 형과 동생의 절개
신숙주의 첫째 형 신맹주(?~?)는 신숙주가 선왕(세종·문종)들의 눈물 어린 고명을 저버린 채 수양대군의 찬탈에 적극 동조하여 공신 1등에 책록되자 충격을 받았다.
유교적 명분과 신의를 저버린 동생의 변절을 차마 눈앞에서 볼 수 없었던 신맹주는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관직의 기회와 권력의 줄을 미련 없이 버렸다.
그는 동생이 권력의 중심에서 승승장구할 때, 침묵으로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가문의 최소한의 도덕적 양심을 수호하며 평생을 야인으로 은둔했다.
전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 귀래정
막내 동생 신말주(1429~1503)는 1454년(단종 2년) 문과에 당당히 급제하여 사간원의 요직에 보임되면서 관료로 첫발을 내디뎠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사간원의 벼슬을 내던지고 전북 순창으로 낙향했다.
신숙주가 수차례 다시 벼슬길에 나올 것을 강권하고 회유했으나, 신말주는 이를 거절하고 형의 변절을 부끄러워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뜻을 담은 정자인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평생 자연을 벗 삼아 처사로 은둔했다.
신숙주의 후손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은 "조상의 잘못된 변절과 명분 상실이 가문과 민족에 누를 끼쳤다"며 평생을 독립 투쟁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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