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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와 연산군이 사랑한 과일 '여지'

편집인 2024-05-03 16:45:21
양귀비(719-756)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꼽힌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은 침어낙안 폐월수화(浸魚落雁, 閉月羞花)라는 극적인 표현으로 설명된다. 

침어는 서시, 낙안은 왕소군, 폐월은 초선, 수화는 양귀비를 상징한다. 

풀이하면 "서시의 미모에 빠진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 가라앉았고, 왕소군의 외모에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고 떨어졌고, 초선의 아름다움에 달이 부끄러워 숨었다"는 뜻이다.






양귀비를 가리켜 수화(羞花)라 했는데, 부끄러울 수(羞)자를 써서 아름다운 꽃도 그녀의 미모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는 뜻이다.

또한 백거이(772~846)의 시 '장한가'에서는 '눈웃음 한 번에 온갖 교태가 나와 단장한 궁궐의 미녀들이 낯빛을 잃었다'는 문구가 나온다.

양귀비로 알려진 당나라 현종의 귀비(貴妃) 양옥환(楊玉環)은 중국 고전 미인의 대명사이다.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4대 미녀 가운데 유일하게 생몰연대가 정확한 여인이며, 서시(西施), 초선(貂嬋), 왕소군(王昭君)과 달리 풍만한 몸매를 가진 미인이었다고 한다. 

중국에 “미인은 풍만하든 날씬하든 모두 다 미인이다”라는 환비연수(?肥燕瘦)라는 말이 있다. 

“양귀비(본명 옥환)는 풍만했고 조비연(??燕, 한나라 성제 때 미인)은 말랐지만 모두 미인이다”라는 것이다.  두 미인의 상반된 신체미를 표현한 말이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과일 '리치(?枝 여지)'는 양귀비와 관련이 많다.

중국 이름은 여지인데 원래 이름은 이지(離枝)였다고 한다. 이 과일은 달린 가지와 함께 잘라서 보관하여야만 신선도를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말을 빌려 만약 열매를 가지에서 분리하면 하루면 색이 변하고 3일이면 맛이 변한다고 하였다.

여지는 남방과일이라 당시 장안(지금의 섬서성 서안)에서는 맛볼 수 없었는데, 광동 출신 환관 고력사(高力士)가 아부하느라 이 과일을 장안까지 나무째 공수하면서 백성을 괴롭게 했다.

양귀비가 가장 좋아한 이 남방과일은 쉽게 상하기 때문에 장안까지 과일나무를 통째로 옮겨와야 했다. 그러니 논밭을 가로질러 수 많은 농사를 망쳐 원성이 자자했다.

양귀비가 살던 장안은 현재 중국 쓰촨성 시안(西安)이고 여지의 산지는 광둥성으로 그 거리는 10만 8천 리로 요즘도 기차로 26시간, 비행기로 3시간이나 걸린다.

그렇게 먼 거리를 말을 타고 달려 여지를 장안까지 갖고 왔는데 그 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먼지를 일으키며 급하게 말을 달리는 병사를 보며 백성들은 나라에 큰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걱정했을 텐데 실은 현종이 양귀비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양귀비가 얼마나 여지를 즐겨먹었는지 관련된 시구가 있다. 두목(杜牧, 803-852)의  "화청궁을 지나며(過華淸宮)" 라는 7언절구는 풍자의 힘과 멋을 알게 해 주는 명시중의 명시다.





서주 말기에 주 유왕은 지금의 이곳에 리궁을 세웠다. 당나라 때인 644년에는 당태종 이세민이 탕취안궁을 지었고 현종이 이를 증축한 뒤 화청궁이라 개칭하였다.


화청궁은 장안 동쪽 의 여산(驪山) 기슭에 있는 행궁으로 당현종과 양귀비는 매년 10월 이곳으로 와 온천을 하였다. 

화청궁은 주나라 때부터 황실의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와 자주 찾아와 대규모로 전각을 짓고 정원을 만들면서 유명해진 곳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의 상징이 되었다.

이 시는 두목(杜牧)이 화청궁을 지나 장안으로 가는 여정에 당현종과 양귀비의 옛 일을 떠 올리며 지은 것이라 한다.  

장안에서 돌아보면 비단을 쌓은 듯 수려한 여산(長安回望繡成堆, 장안회망수성퇴) / 산정상의 화청궁 겹겹이 닫힌 대문들이 차례차례 열리는구나(山頂千門次第開, 산정천문차제개).

흙먼지 일으키는 한 필의 말에 양귀비 미소짓건만(一???妃子笑,  일기홍진비자소) / 아무도 여지(?枝)가 막 도착했다는 걸 알지 못하네(無人知是?枝?, 무인지시려지래).

조선시대 명나라 황제는 여지를 조선에 선물했다. 1403년 영락제는 여지 등 과일을 조선 사신에게 주었고 태종에게 올렸다. 

1411년 조선 태종이 태평관에서 연회를 열고 명나라 사신 황엄을 초대하자 황엄은 여지 등 진귀한 물건을 선물로 올렸다. 

1452년 명나라 사신은 조선의 단종에게 여지와 용안을 한 상자씩 선물로 올렸다. 조선에서 세조, 예종이 즉위하자 명나라는 예외 없이 여지를 선물했다.






특히 연산군의 여지 사랑은 남달랐다. 1496년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연산군은 승정원에 해마다 명나라로 가는 사신에게 여지를 구입해오라고 명령해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1497년 연산군은 대신의 반대를 고려해 용안과 여지 두 가지 물품만 사오라고 명을 내렸다. 연산군 10년(1504년) 윤 4월, “지난번 사온 여지 등이 좋지 못하니 성절사 편에 좋은 것으로 사 오라”라고 명한다.

연산군 12년(1506년) 4월에는, “맛이 단 여지는 연경에서 사들이고 후추는 왜인들에게서 사들이라”라고 명한다. 그의 ‘여지 사랑’은 강화 교동도로 쫓겨난 후에야 끝난다.

지금은 한중 무역이 발전하면서 중국 남부 지역과 아세안에서 여지가 다량 한국으로 수출돼 일반 가정에서도 여지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을 500년 전 연산군이 봤다면 부러워했을 것이다.

여지(lychee)는 아열대성 과일로 중국 남부인 푸젠(福建), 광시(廣西), 하이난(海南) 등에서도 생산되는데 중국 생산량의 절반 이상이 광둥(廣東) 성에서 나온다. 

중국은 여지의 원산지이자 생산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다. 중국의 특색 있는 과일 하면 여지가 떠오르는 이유이다. 4월쯤 꽃이 피고 5월부터 8월까지가 수확기이다.

「본초강목」에 따르면 여지는 간을 보호하고 보혈, 진통의 기능이 있다하여 한약재로 쓰이기도 했다.

「동의보감」에서는 '정신을 깨끗하게 하고 지혜를 도우며, 갈증을 멎게 하고 얼굴빛을 좋게 한다'고 소개한다.





양귀비가 즐겨 먹던 리치


여지는 100g당 66kcal로 칼로리가 낮고 지방 함량이 거의 없기 때문에 체중감량을 원하는 사람들이 식사 시간에 곁들여 먹거나 간식으로 선택하면 좋다.

또한 여지에 포함된 풍부한 식이섬유와 무기질은 배변 활동을 자극하고 식욕을 억제하며 신진대사를 증가시킨다.

이 외에도 여지는 마그네슘이 풍부해 수면을 돕고, 칼륨 비율이 높아 건강한 혈압 유지 등에 영향을 끼친다. 여지의 씨인 여지핵은 맛이 달고 쓰며 성질은 따뜻하다.

기의 순환을 촉진하고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며 통증을 완화시킨다. 고환염, 복통에 효과가 있으며, 특히 여성들의 아랫배가 차고 아플 때 좋다.

다만 리치의 하이포글리신 성분이 체내 혈당을 급격히 낮춰 저혈당 쇼크가 일어날 수 있으므로 공복에 먹는 것은 피해야 한다.